1910년 1월 31일 저녁, 런던 할로웨이 인근 힐드롭 크레센트의 한 저택에서 두 쌍의 부부가 함께 저녁을 즐겼다. 주인 부부는 홈오패시 의사 호울리 하비 크리펀 박사와 그의 아내 벨 엘모어였고, 그들과 함께한 손님은 클라라와 폴 마르티네티 부부였다. 이들은 새벽까지 파티를 이어가다가 택시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은 뒤, 새벽 1시 30분경 귀가했다. 이때가 벨 엘모어가 생존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엘모어는 음악홀 여성 길드의 회계였고, 동료들이 그녀의 행방을 묻자 크리펀은 그녀가 미국에 있는 가족 문제를 해결하러 갔다고 설명했다. 몇 주 뒤, 그는 엘모어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이중 폐렴으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로 인해 영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국제 살인사건이 시작되었고, 이는 훗날 “세기의 범죄”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할리 루벤홀드의 책 《Story of a Murder》는 사건의 발단을 더 오래전으로 돌려, 크리펀이 뉴욕에서 간호사 샬럿 벨과 만나 결혼하던 시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부부는 샌디에이고로 이주해 아들을 낳았고, 다시 다른 도시로 옮겼다. 1880년대 미국은 철도망이 급격히 확장되던 시기였고, 사람들은 도시를 바꾸며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크리펀은 그런 인물이었다. 샬럿이 뇌졸중으로 사망한 후, 그는 곧바로 다른 여성과 재혼했다.
두 번째 아내는 브루클린 출신 쿤리군데 마카모츠키로, 이름을 여러 번 바꾸다 벨 엘모어라는 예명으로 정착했다. 부부는 미국 전역을 돌며 활동하다가 런던으로 이주했다. 크리펀은 드루에 연구소에서 의약품을 판매하며, 엘모어는 오페라 가수의 꿈을 좇았다.
루벤홀드는 이 지점에서부터 당시 에드워디안 시대의 퇴폐적 분위기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벨 엘모어는 뮤직홀 무대로 옮겨 보석과 모피에 돈을 쓰며 화려한 삶을 추구했고, 크리펀은 계속해서 ‘소규모 사기꾼들’을 위한 약을 팔며 돈벌이에 매달렸다. 그는 27세의 타이피스트 에텔 르 네브와 사랑에 빠지며 이중생활을 시작한다.
엘모어는 난소 제거 수술을 받아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크리펀은 아내와의 결혼생활을 이어가며 동시에 르 네브에게 결혼을 약속했다. 결국 어느 쪽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그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엘모어가 사라진 지 몇 주 후, 크리펀이 르 네브와 함께 자선 무도회에 참석한 것이 큰 실수가 된다. 그의 동료들은 르 네브가 엘모어의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1910년 6월, 르 네브는 엘모어의 자리를 완전히 대신하게 된다. 그녀는 엘모어의 집과 옷, 돈, 심지어 남편까지 차지했다. 크리펀은 모든 흔적을 지웠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루벤홀드는 전작 《The Five》에서도 잭 더 리퍼의 희생자들에 초점을 맞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번 작품에서도 범죄자보다 그 주변 여성들에게 시선을 돌리려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시도가 완전히 성공하지는 않는다. 잭 더 리퍼와 달리, 이 사건에서는 범인이 명확하며, 냉정하고 무표정한 크리펀이 여전히 이야기의 핵심 축이다.
이 책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는 ‘누가’가 아니라 ‘왜’다. 그러나 루벤홀드조차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자료가 부족한 지점마다 저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불확실하다”, “추정에 불과하다”는 표현을 반복할 수밖에 없으며, 진실은 결국 픽션이라는 장르의 상상력에 기대야 한다고 시사한다.
그렇다고 《Story of a Murder》가 흥미나 긴장감을 결여한 것은 아니다. 사건의 첫 전환점은 바로 힐드롭 크레센트 자택 지하실에서 발견된 훼손된 시신이었다. 시신에는 최근 크리펀이 구입한 독극물 하이오신의 흔적과 함께 그의 잠옷 조각이 발견됐다. 잔혹함만큼이나 그의 서툰 범행이 세간의 충격을 더했다. 크리펀과 르 네브는 벨기에로 도주했고, 르 네브는 소년으로 위장한 채 SS 몬트로즈 호를 타고 캐나다로 향했다.
이 책은 단순한 범죄 서사를 넘어, 당시 여성들이 겪은 사회적 억압과 관계의 불균형을 조명하며 역사적 통찰을 더한다. 루벤홀드의 치밀한 조사와 생동감 있는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20세기 초의 어둠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