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가와 극장가, 이 거대한 스크린 너머의 세계는 결국 인간의 ‘진짜 삶’을 어떻게 도려내어 프레임 안에 이식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처럼 보인다. 당장 텔레비전 편성표만 훑어봐도 그렇다. 거시적인 인류 역사를 다루는 지적 쾌감부터, 지극히 사적이고 미시적인 가족 간의 민낯까지 그 스펙트럼이 꽤나 다채롭다.

KBS가 오는 29일 밤 10시에 첫선을 보이는 8부작 다큐멘터리 ‘사이언스 워-거인의 전쟁’은 인류의 세계관을 통째로 뒤흔든 과학계 거인들의 피 튀기는 지식 전쟁을 조명한다. 묵직한 내러티브를 끌고 갈 스토리텔러로 배우 조우진이 등판하고, 여기에 대중에게 친숙한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가 합류했다. 자칫 겉돌 수 있는 복잡한 과학 이론들을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춰 매끈하게 발라낼 참이다.

우주와 진리를 향한 이 거대한 담론의 한편에서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끈끈한 관계의 민낯들이 시청자들의 훔쳐보기 욕망을 자극할 준비를 마쳤다. 당장 2월부터 화요일 밤 10시 40분으로 자리를 옮겨 ‘틈만 나면,’의 바통을 이어받는 SBS 부부 관찰 예능 ‘동상이몽2-너는 내 운명’이 그렇고, 다음 달 25일 저녁 8시 tvN 스토리와 E채널에서 공동 방영하는 ‘내 새끼의 연애’ 시즌2가 그렇다. 특히 자식의 연애사를 부모가 스튜디오에서 지켜본다는 이 묘하게 낯뜨겁고도 신선한 포맷의 두 번째 시즌에는, 과거 ‘아빠 어디가?’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윤민수, 윤후 부자가 출격해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 할 예정이다.

거대한 과학사든, 스타 부부의 투닥거림이든, 훌쩍 커버린 아들의 데이트를 지켜보는 아버지의 헛기침이든 결국 우리가 화면 너머로 목격하길 원하는 건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이다.

이 지점에서 최근 상하이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 무대에 오른 싱가포르의 앤서니 첸 감독과 그의 오랜 페르소나 여얀얀이 털어놓은 14년의 궤적은 꽤나 흥미로운 텍스트로 다가온다. 한·싱 합작 영화 ‘아줌마’의 제작자로도 한국과 연을 맺었던 첸 감독은, 현재 한국 작가와 2년째 새로운 스크립트를 주무르며 또 한 번 한국과의 접점을 넓히고 있다. ‘비극적인 이야기에 대한 코믹한 접근’이 될 거라는 이 신작 소식 못지않게 이목을 끈 건, ‘일로 일로(Ilo Ilo)’, ‘젖은 계절(Wet Season)’, ‘우리는 모두 낯선 사람들(We Are All Strangers)’로 이어지는 그들의 ‘성장(Growing Up)’ 3부작에 얽힌 지독하게 사적인 비화였다.

첸과 여얀얀, 그리고 배우 코지아러. 이 세 사람은 14년이라는 세월을 관통하며 단순한 감독과 배우를 넘어선 일종의 ‘시네마 패밀리’로 결속되어 왔다. ‘일로 일로’를 찍을 당시 20대 풋내기였던 감독과 갓 엄마가 될 준비를 하던 여배우는, 시리즈의 마침표를 찍을 즈음 40대의 아버지와 50대를 바라보는 중년이 되어 있었다. 여얀얀은 ‘일로 일로’ 캐스팅 당시 첫아이 임신 사실을 알리며 주연 자리를 고사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첸은 그녀를 포기하는 대신 아예 대본을 뜯어고쳐 그녀의 불룩한 배를 영화 속에 그대로 박제해 버렸다. ‘젖은 계절’을 촬영할 당시의 여얀얀은 그녀의 삶을 통째로 짓눌렀던, 스스로 “살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 뻔했다”고 회고할 만큼 지독했던 산후우울증의 늪에서 갓 빠져나온 상태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어낸 각기 다른 연령대의 분노, 절망, 희망, 그리고 생채기들을 고스란히 필름 위에 토해냈다. 허구의 인물을 연기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부피는 철저히 진짜였다. 대만 영화의 거장 허우샤오시엔이 첸에게 남겼다는 “네가 카메라로 찍지 않은 것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는 조언은 이들의 작업 방식을 관통하는 서늘한 진리다. 카메라 앞에서 그 날것의 감정을 끌어내어 포착하지 못한다면, 편집실 모니터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

결국 첸에게 연출이란 거창한 대사나 유려한 동선의 디렉팅이 아니라, 인물이 내쉬는 숨소리와 아주 찰나의 정적을 매만지는 일이다. 그는 그 미세한 틈새에서 진짜와 가짜를 감각적으로 체감한다. 거인들의 치열했던 두뇌 싸움을 복기하는 다큐멘터리도, 스튜디오에 앉아 가족의 일상을 관찰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14년에 걸쳐 한 인간의 삶을 집어삼킨 영화의 프레임도 어쩌면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침묵과 호흡, 그 사이에 묻어나는 진짜 삶의 진동을 기어코 포착해 내겠다는 집념 말이다. 굳이 이 모든 텍스트를 하나의 명제로 묶어 완벽하게 결론 내릴 필요는 없겠다. 스크린은 그저 비워진 정적만큼의 여지를 남겨둘 때 가장 우리의 현실과 닮아있으니까.